고향에서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모인 지역 컴퓨터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이다.
생긴것도 소처럼 생겼지만 성격도 소다.
화낼 줄 모르고 순둥이 같아서 이상하게 이 형만 만나면 심기를 건드리는 장난을 치게 된다.
이 형의 취미생활은 재미있었다.
집에가니 책장에 책은 없고 CD만 가득 채워져 있다.
여기 저기서 CD 구워달라는 사람 전화를 받고, 구워서 우편으로 보내주곤 했다.
PC통신 시절에 그런 일로 먹고 산 사람들이 꽤 된다.
나는 오기로라도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고 했지만, 귀찮을땐 형한테 부탁하기도 했다.
이직을 고민할 때였던것 같다.
리눅스 서버를 다루고 싶어서 들어온 회사에서 컴퓨터 A/S와 같은 잡무로 고민할 때, 어떤 사람이 날 스카웃 하러 들어닥칠 때였다.
지방 IT육성자금으로 지역최초의 웹에이전시가 탄생한다는 소문이 이미 돌았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인지 알고는 있었다.
그 사장님의 첫 만남은 아직도 기억이 남는다.
그 때 근무하던 회사 사장님에게 나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서버를 여기서 사겠다고 했단다.
자그마치 1억 5천만원 가까이 되는 장비인데 마다할리 있겠나.
나도 누군가에게 기술력으로 인정 받아서 스카웃 되는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펜티엄으로 리눅스를 다루던 내가 솔직히 한 대에 4천만원 가량하는 서버를 다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망설여졌다. 괜히 들어가서 민폐만 끼치는게 아닌가 싶어서다.
결국은 들어가서 4천만원짜리 서버를 몽땅 분해 해버리고 나서야 자신감이 생겼다. 하하.
그 당시 종윤이형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워낙 걷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보통 사람들이면 귀찮아서 버스타고 다니던 거리를 몇 일을 같이 걸어다녔다.
X파일부터 외계인 이야기, 자기집 지하 28층에 금송아지 200마리 있는. 뭐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들 뿐이였지만
답답할때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줬던 고마운 형이다. 그런 인연이 10년을 넘겼다.
그 형도 내가 좋은지 내가 서울 올라오고 얼마후에 서울에 올라왔고, 내실있는 기업에서 같은 분야의 경력을 쌓고 있다.
2009년은 나에게 참 힘든 한 해였다.
개인적으로도 회사일도 내가 살면서 이렇게 한 해를 보낸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래도 옆에서 든든하게 소주 한잔 해주는 그 형이 고마울 때가 많다.
요즘 여자 만나긴 하는거 같은데 장가갈 생각은 별로 없나보다.
고향집 지하 28층 금송아지 한마리만 팔아도 편하게 살건데 말이다.
혹 이 글을 보는 여성분 중에, 정말 착한 남자를 찾는다면 추천해주고 싶다.
순둥이형. 죽을 때까지 잘 살아 봅세.